
일본에서 살아보니, 여행할 때는 보이지 않았던 것들
돌이켜보면 나에게 일본은 처음부터 완전히 낯선 나라는 아니었다. 부모님이 일찍 이곳에 자리를 잡으신 덕분에 자연스럽게 왕래를 하게 되었고, 그렇게 이어진 인연 속에서 지금은 이곳에서 가정을 꾸리고 살고 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 시절 자주 드나들던 일본과 정착하고 사는 일본은 전혀 다른 얼굴이다. 친숙하다고 생각했던 나라에서 살아보고 나서야 비로소 보이기 시작한 것들을 이 블로그에 적어보려고 한다.
1. 쓰레기 분리수거 — 보이는 결과 뒤의 일상

여행 중에는 "일본은 참 깨끗하구나" 하고 무심히 지나쳤던 거리였다. 하지만 실제로 살아보니 그 깨끗함 뒤에는 타는 쓰레기, 안 타는 쓰레기, 페트병, 캔, 병, 종이류를 요일별로 세세하게 나누고, 이를 어기면 이웃들 사이에서 은근한 눈총을 받는 촘촘한 시스템이 자리하고 있었다. 잘 정돈된 깨끗한 거리는, 결국 주민들이 정성을 다해 가꾸어 낸 기분 좋은 일상이었다.
2. 혼네와 다테마에 — 친절함 너머의 결

여행 중 만나는 친절은 대체로 정해진 매뉴얼 안에서 이루어지는 '손님에 대한 친절'에 가깝다. 그런데 이웃으로, 사회의 일원으로 살아가다 보면 그 친절 너머에 있는 일본 특유의 결을 마주하게 된다. 바로 혼네(속마음)와 다테마에(겉으로 드러내는 태도) 사이의 간극이다. 겉으로는 부드럽게 웃으며 이야기하지만 정작 본인의 진짜 생각은 좀처럼 꺼내지 않는 이 대화 방식은, 여행으로 오시는 분들은 결코 알 수 없는 부분이었다.
3. 갈등을 대하는 방식 — 부딪히지 않고 풀어가는 법

한국에서는 문제가 생기면 비교적 직접적으로 부딪히며 풀어가는 문화에 익숙했다. 반면 이곳에서는 정면으로 맞서기보다는 시간을 두고 서서히 거리를 두거나 우회적으로 마음을 전달하는 경우가 많았다. 처음엔 그런 방식이 답답하게만 느껴졌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알게 되었다. 이건 관계를 급격히 무너뜨리지 않으면서 갈등을 다루려는 일본 사회 나름의 방식이었다는 것을...
4. 행정 시스템 — 느리지만 예외 없는 원칙

여행자로 이 곳에 머물렀을 당시에는 거의 보이지 않던 일본의 행정 시스템도, 거주지를 정하고 아이를 학교에 보내고 건강보험을 챙기다 보면 조금씩 그 모습을 드러낸다. 동사무소에 해당하는 야쿠쇼에서는 모든 절차가 서류와 도장, 정해진 순서를 따라 진행된다. 처음엔 이 관료적인 절차가 답답했지만, 예외를 최소화하고, 누구에게나 동일한 기준을 적용하려는 원칙이 그 느림 속에 있음을 이제는 이해하게 되었다.
5. 계절감각 — 풍경이 아니라 생활

며칠 머물다 가는 여행자에게 벚꽃 시즌은 잠시 스쳐 가는 아름다움이다. 하지만 이곳에서 살아보니 계절은 단순한 풍경이 아니라, 한 해를 채워가는 생활의 리듬에 가까웠다.
1월은 오쇼가쓰(설)로 한 해를 열고, 3월엔 졸업식이, 4월엔 입학식과 함께 새 학기가 시작된다. 6월엔 장마가 찾아오고, 7~8월엔 여름 축제와 태풍이 번갈아 이어진다. 10월엔 운동회, 11월엔 시치고산(七五三)으로 아이의 성장을 기념하며, 12월엔 연하장을 준비하며 한 해를 조용히 마무리한다.
생각해보면 한국에도 설, 졸업과 입학, 장마와 김장철처럼 비슷한 리듬이 있다. 다만 그 마디를 이루는 이름과 방식이 다를 뿐, 어느 나라에서 살든 계절은 결국 삶의 흐름을 짓는 시간이라는 사실은 다르지 않다.
6. 소비 습관 — 여행자의 지출과 생활자의 계산

여행할 때는 조금 비싸도 "여행이니까" 하는 마음으로 넘어가는 소비가 많다. 하지만 매달 월세와 공과금, 교육비를 계산해야 하는 생활자에게는 슈퍼마켓의 특매 시간이나 계절별 세일, 지역 상점가의 포인트 카드 같은 세세한 정보들이 훨씬 더 소중해진다. 여행 중 잠깐 들렀던 백엔샵도, 살림을 꾸리는 생활자에게는 없어서는 안 될 든든한 거점이 된다.
7. 언어의 결 — 문법이 아니라 침묵을 읽는 법

여행 중에는 간단한 인사말이나 메뉴판을 읽을 수 있는 정도의 일본어면 충분했다. 그런데 살아보니 정말 필요한 건 유창한 실력이 아니라, 말과 말 사이에 놓인 침묵을 읽어내는 감각이었다. 상대가 말끝을 흐리며 문장을 다 맺지 않을 때, 그 속에 담긴 완곡한 거절을 알아채는 일. 이런 건 어떤 교재를 펼쳐봐도 나오지 않는, 전혀 다른 차원의 언어였다.
침묵의 길이도 하나의 언어였다. 한국에서라면 정적을 채우려 먼저 말을 꺼내곤 했지만, 이곳에서는 그 침묵이 상대에게 생각할 시간을 내어주는 배려로 여겨지는 경우가 많았다. 같은 "はい(네)"라는 대답도 억양과 타이밍에 따라 진짜 동의인지, 예의상 하는 대답인지가 미묘하게 달라졌다. 결국 언어란 단어와 문법의 총합이 아니라, 그 말이 놓인 자리와 관계, 그리고 침묵까지 포함한 감각이라는 걸 이곳에서 오래 살아가며 배웠다.
결국 남는 것은 '사람'
일본에서 살아보고서야 비로소 보이기 시작한 것들은 결국 '이 사회 안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가' 하는 것이다. 여행자는 풍경과 서비스를 스쳐 지나가듯 만나지만, 생활자는 그 풍경 속에서 함께 살아갈 사람들과 시간을 두고 관계를 쌓아간다. 돌아보면 언어를 배우고, 계절의 리듬을 익히고, 시스템을 이해하는 것도 결국은 관계 속에서 흔들리지 않고 자리를 잡기 위한 과정이었다. 낯선 나라에서 진짜 뿌리를 내리게 해주는 건 완벽한 적응이 아니라, 곁에서 마음을 나눠줄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나는 이 사회에서 정착을 준비하는 이들에게 가장 먼저 해주고 싶은 말이, 언어나 제도보다도 '좋은 사람들과의 관계'라고 생각한다.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결혼과 정착을 경험해온 사람으로서, 나는 이런 이야기들을 종종 나누고 싶어진다. 여행 가이드북에는 나오지 않지만, 이 사회에서 정착하여 가정을 이루고 살아가려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알아두면 좋을 것들 말이다. 처음 몇 년은 이런 차이들을 몸으로 부딪히며 배웠지만, 돌이켜보면 먼저 그 길을 걸어본 사람의 한마디가 어떤 안내서보다 큰 힘이 되어주곤 했다. 이 블로그에서도 그런 이야기들을 하나씩 천천히 풀어가 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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